

지식에서 실행으로 - KSP 실행형 협력모델의 진단과 향후 방향2026년 9월 7일, 서울 그랜드 워커힐 비스타홀에서 '지식공유를 통한 AI·디지털 전환과 포용적 성장'을 주제로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 성과공유컨퍼런스가 개최됐다. 22년간 40여 개국과 축적해온 KSP의 성과를 돌아보는 자리이자,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방향을 묻는 자리였다. 이번 컨퍼런스를 관통한 메시지는 명확했다. KSP는 정책 경험을 '나누는' 원조에서, 협력국과 함께 정책을 '만들고' 이를 사업과 금융으로 '연결하는' 실행형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 세션의 표제가 말해주듯, 이제 화두는 '지식에서 실행으로(From Knowledge to Action)'다.
실행형 협력모델의 완성: 케냐 콘자가 증명한 KSP–EIPP–EDCF 파이프라인 이번 컨퍼런스의 첫 주인공은 케냐 콘자 테크노폴리스였다. '아프리카의 실리콘 사바나'로 불리는 콘자는 나이로비 남쪽 약 65km 지점에 조성 중인 총 2,000ha 규모의 스마트시티로, 완공 시 인구 24만 명, 총투자 1조 5,000억 케냐 실링, GDP 기여 2%를 목표로 한다. 콘자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협력의 단계가 완결형이라는 데 있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KSP가 산업 클러스터·산업단지·지능형교통(ITS)·디지털미디어시티(DMC) 등 4개 연도의 정책 제언을 적층했고, 2021년부터는 EIPP(경제혁신파트너십프로그램)가 마스터플랜 수립과 예비타당성·타당성조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 흐름은 EDCF 차관으로 이어졌다. 나이로비 ITS·교차로 개선사업(6,100만 달러, 25개 교차로, 2026년 6월 완공 예정), 케냐-한국 과학기술원(Kenya-AIST, 2026년 개교 예정), DMC 타당성조사 차관협정(2024)까지. '정책 제언 → 마스터플랜 → 타당성조사 → 차관·투자'로 이어지는 통합 파이프라인이 실제로 작동한 것이다. 눈여겨볼 점은 성과의 조건이기도 하다. 케냐 발표는 콘자의 성공요인을 ①비전 2030 플래그십 지정이라는 강한 수원국 오너십 ②KoTDA라는 전담 조직의 일관된 거버넌스 ③양국 전담기관 간 긴밀한 조정 ④인력의 연속적 참여에 따른 암묵지 축적 ⑤앵커 프로젝트 우선 추진으로 정리했다. 즉 실행형 모델의 성패는 결국 '제도와 사람'에 달려 있다는 것. 우연이 아니고 설계의 문제다.
제도화의 힘: 우즈베키스탄 KSP Plus, '적응'의 성공 사례 두 번째 사례는 우즈베키스탄의 디지털 금융혁신이다. 배경은 명확하다.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의 85.5%, 고용의 74%, GDP의 54.3%를 차지하는 경제구조에서 담보 중심 금융과 취약한 벤처투자는 성장의 장애물이었다. '혁신이 규제보다 앞서는' 현실 속에서 우즈벡 정부는 2022년 KSP Plus를 통해 다년도 정책 자문을 요청했다. KSP Plus는 진단(2022/23) → 법률 설계(2023/24) → 이행 유예년 → 지속가능성 평가(2025/26)로 이어지는 2+1 방식의 협력 모델로, 정책 제언을 '법령'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는 데 초점을 둔다. 그 결과물이 중앙은행 규정 제3391호(2022, 금융 규제 샌드박스)와 대통령령 PQ-359(2025, 핀테크 국가정책)다. 현재까지 샌드박스 신청 29건 중 9건이 승인됐고, 중앙은행 내 핀테크 개발 부서와 공화국위원회(2025.11)가 신설됐으며, 5,000만 달러 규모의 벤처펀드가 조성됐다. KSP가 우즈벡 핀테크 관련 법규 20여 개 중 절반가량의 제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즈벡 발표가 반복해서 강조한 원칙은 '이식이 아닌 적응(Adapt, do not transplant)'이었다. 한국의 규제 샌드박스 경험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금융감독 체계와 중소기업 수요에 맞게 재설계했다는 것이다. 지식공유사업의 진정한 성과는 보고서가 아니라, 협력국 안에 자리 잡은 제도와 그 제도를 운영할 기관의 존재다. 우즈벡 사례는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자 공동컨설팅의 부상: MDB와 함께 쓰는 개발협력의 새 코드 세션 2는 KSP의 또 다른 진화 축을 보여줬다. 라이베리아 사례는 아프리카개발은행(AfDB)과, 도미니카공화국 사례는 미주개발은행(IDB)과의 공동컨설팅으로 추진된 최신 과제다. 라이베리아의 세수/GDP 비율은 12.39%(2012~2024 평균)로 사하라 이남 평균(약 16%)을 밑돌고, 비공식 경제가 GDP의 45~50%에 달한다. 발표자의 진단은 통찰력 있다. "이것은 세율이나 징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시성(visibility)의 문제"라는 것. 그래서 라이베리아는 정책연구서가 아닌 '디지털 배관(digital plumbing)'을 요청했고, KSP-AfDB는 전자송장, 정부서비스버스(GSB), VAT 모듈, 국가데이터센터 등 ICT 인프라 구축을 로드맵으로 제시했다. 2029년까지 세수/GDP 16% 달성, 납세자 기반 40% 확대, 순응비용 30% 절감이 목표다. 도미니카공화국 역시 고정 브로드밴드 보급률 34%, 학교 연결 54%, 1차보건시설 연결 56%라는 디지털 격차를 진단하고, 5대 전략기둥·16개 개선과제·단계적 로드맵을 제시했다. 핵심 메시지는 한국 경험은 '블루프린트가 아닌 레퍼런스'이며, 목표는 로드맵이 아니라 '금융가능하고 이행가능한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이라는 점이었다. KSP가 MDB와 손잡는 삼각협력은 진단의 신뢰성을 높이고 후속 금융 연계의 길을 여는 이중 효과를 낸다. 개도국의 눈에는 '한국 정부의 자문'이 아니라 '글로벌 개발금융기구가 검증한 자문'으로 보이는 것이다.
AI·디지털 시대의 KSP: 스마트시티에서 스마트 거버넌스로 태국 나콘랏차시마 사례는 이번 컨퍼런스의 주제인 'AI·디지털 전환과 포용적 성장'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한 과제였다. 코랏 시장이 제시한 진단은 단순하다. "핵심 과제는 제도·운영 성숙도이지 기술이 아니다." 통합관제센터(IOC)가 물리적 토대를 갖췄지만 전담 조직·법적 프레임워크가 없고, 부서별 데이터 사일로가 남아 있다는 것. 해법으로 제시된 '코랏 6K' 프레임워크(전략·서비스·데이터·운영·통합·역량)는 서울 TOPIS와 안양 스마트시티센터의 벤치마킹을 현지 법·행정 체제에 맞게 적응시킨 것이다. 토론자들이 남긴 문장도 인상적이다. "국가 디지털전환은 기술 프로젝트가 아니라 행정개혁이다", "FOR 국가가 아닌 WITH 국가의 원칙", "데이터 통합은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문제", 그리고 "스마트시티에서 스마트 거버넌스로 — 다음 프런티어는 더 똑똑한 시스템이 아니라 더 똑똑한 제도"라는 결론까지. 케냐·우즈벡·태국·라이베리아·도미니카, 다섯 사례가 모두 같은 지점으로 수렴한다.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사람이다.
KSP가 풀어야 할 세 가지 도전과제 그렇다면 KSP의 미래를 가로막는 도전과제는 무엇인가. 이번 발표자료에서 세 가지가 도출된다. 첫째, 사업화 단계 간 리드타임 지연이다. 케냐 발표가 직접 지적했듯, EIPP에서 정교한 프로젝트 제안이 도출된 뒤에도 EDCF의 차관 승인·실사가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초기 사업 모멘텀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실행형 모델의 발목을 잡는 가장 현실적인 병목이다. 둘째, 이행과 사후관리의 공백이다. 권고안이 나온 뒤 협력국이 실제로 수용·이행했는지 추적하는 체계가 사례마다 편차가 크다. 라이베리아 발표의 교훈 - "진단은 계획이 아니다" - 는 KSP 내부에 그대로 적용될 필요가 있다. 모든 권고에 세수 효과, 예산, 로드맵, 소관 부처가 명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셋째, 성과의 증거 부족이다. KSP는 그동안 '스토리'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케냐의 정량적 연계분석(프로젝트 간 유사도 지표로 연계 강도를 측정), 라이베리아의 세수효과 추정, 도미니카의 우선순위 분석처럼 성과를 수치로 입증하려는 시도는 아직 일부 사례에 국한된다. '감동적인 사례'에서 '검증된 성과'로 넘어서야 할 시점이다.
향후 방향성: 지식공유를 넘어 동반 성장 플랫폼으로 이상의 진단을 바탕으로 KSP의 향후 방향성을 다섯 가지로 제언한다. 첫째, 통합 파이프라인의 표준화다. '정책 자문 → 타당성조사 → 차관·투자'의 3단계 연계를 케냐·태국 경험을 바탕으로 매뉴얼화하고, 단계 간 전환 기준(기대 세수효과, 재무적 타당성 등)을 사전에 정의해야 한다. 특히 EIPP-EDCF 간 승인 절차의 병렬화와 표준 문서 패키지 도입으로 리드타임을 단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 KSP Plus와 다년도 모델의 확대다. 우즈벡이 증명했듯, 제도 개혁형 과제는 1년 단위로는 완결될 수 없다. 진단-설계-이행-평가의 사이클을 고정하고, '이행 유예년'을 공식 제도화함으로써 권고안이 법령과 기관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 셋째, MDB 공동컨설팅의 지역적 확장이다. AfDB·IDB의 성과를 아시아개발은행(ADB)과 최빈국·취약국으로 확대하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진단과 권고는 KSP가, 배후 금융은 MDB가 담당하는 구조가 삼각협력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넷째, 성과관리 체계의 구축이다. 사업별 KPI 대시보드, 세수 효과·일자리·GDP 기여 등 계량적 파급효과의 측정, 그리고 이행률 공개를 통한 책무성 강화가 필요하다. '증거 기반 K-ODA'는 한국 개발협력의 차별적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다섯째, 포용성 지표의 내재화다. 디지털 전환의 혜택이 국가·계층 간 격차를 심화하지 않도록, 비공식 경제·디지털 접근성·소외계층 편익을 사업 설계 단계부터 반영해야 한다. 라이베리아의 비공식 경제, 도미니카의 소득 대비 접속비용 문제는 포용적 성장이 구호가 아니라 설계 기준임을 보여준다.
결언: 함께 시장을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KSP는 이제 남이 만든 시장에 진입하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시장과 제도를 설계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번 컨퍼런스가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KSP의 정체성이 '원조'에서 '동반 성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케냐는 차관을 받는 수원국이 아니라 스마트시티의 공동 설계자로, 우즈베키스탄은 정책 수용자가 아니라 규제 샌드박스의 공동 창안자로, 태국은 스마트시티의 공동 운영자로 무대에 섰다. 정책 지식의 수출을 넘어, 협력국이 스스로 혁신을 선택하고 실행할 역량을 키우는 일 - 그것이 22년의 축적을 다음 22년의 도약으로 연결하는 길이다. 지식은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실행'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성장이 된다. KSP의 다음 장(章)은 바로 그 실행의 문법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창호 | C2CP 대표컨설턴트 | 2026.9.7 |